2월26일 2012년 일요 새벽기도회

설교: 하용판 장로

제목:예수라는 차를 타고 가자!

말씀:이사야서 12장 1절~6절

<도입>

설교를 하는 이 순간에도 중국에 두고 온 친구들이 걱정된다.

전능하신 예수님께 그들의 안위를 부탁드린다.

옛날에는 해가 뜨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우리 마음에도 아침이라는 해가 떠야한다.

우리가 예수께로 마음을 돌려야한다.

해가 뜨는 줄 알았는데 지구가 움직이듯이, 이처럼 우리도 예수께로 향해야한다.

<서론>예수를 타고 간 사람들

이곳에 오기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몇일동안 있다가 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걸어가든, 기어가든, 뛰어가든, 운전을 하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나는 경치를 구경하면서 차타고 왔다. 하늘가는 길도 이처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간다.

스티브 잡스는 뛰어서 갔다. 맹렬히 가더니 결국 60세도 못되어 운명했다.

하늘가는 길은 예수님을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예수믿는 것이 힘든 것은 예수를 타지 않아서 그렇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례1>창세기 39장에서 요셉이 형통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형통은 잘 진행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종으로 팔려갔는데 어떻게 형통한가? 종으로 끌려간후 감옥에까지 가는 등 요셉의 길이 갈수록 태산인데 잘 진행된다고 했다. 그가 스트레스 받지 않았다. 예수를 타고 갔기 때문이다. 다니엘, 엘리아,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감옥을 가든 어디를 가든 요셉은 예수를 타고갔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우리가 예수라는 트럭에 올라타면 괜찮다.

요셉이 너무 힘들었지만 무겁지가 않았다.

우리는 교회직분 안 맡으려고 하지만 어차피 안 맡아도 백리만 뛰면 힘들어서 쓰러진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힘들기는 매일반이다.

예수라는 차를 탔느냐 여부가 모든 것을 결정된다.

인간은 낮아져 본들 거기서 거기다. 내가 종된 것은 예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요셉은 생각했다.

예수는 인간이 되기 전에 천사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오셨다.

낮아짐의 정도가 물리적으로 잴 수 없을 정도다.

반면 요셉이 총리가 된 것도 예수의 높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가 태어난 밤에 베들레헴에 아마 천사들이 다 모였을 것이다.

예수는 어마어마한 분이다.

오로지 거기에 가서 앉지 않은 것은 인간 당사자들이다.

예수의 광경에 비하면 낮아져 본들, 높아져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인생을 예수라는 차타고 가길 바란다.

사례2>가정 선교사로서의 어려움

현재 중국에서 경영하는 식당은 중노동이다.

처도 오전 7시30분 출근해서 오후 10시에 퇴근한다.

일년내내 중노동이다. 안식일(오전 8시~오후 4시)에도 목회자들을 위한 봉사로 바쁘다. 구도자들도 온다. 어떤 식당은 가건물에서 하수도없는 곳에 연다.

가정선교사들은 보통 식당을 한다.

가족이 공동으로 일한다. 손님을 150명받는다고 가정을 해보자. 정신이 없고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오전, 오후 잠시 빈 시간에 자녀들과 함께 성경책을 읽는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오는 시조를 줄 그어가면서 본다. 예언의 신도 본다. 검정고시봤고 북경사관학교가서 선교사되는 꿈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면 자녀들이 이렇듯이 우리를 돕는 동역자가 된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에 가면 청소년들이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자동으로 총을 잡는다. 환경의 영향이 그만큼 중요하다.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시행해도 부흥이 잘 안된다고 한다. 우리가 환경의 지배를 받기때문이다.

우리가 재림을 위해서 같이 싸운다는 것을 보면 자녀들이 그렇게 따라온다.

우리의 삶을 "의미와 가치를 위해 산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자녀들도 알게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잔소리할 필요가 없어진다. 선교사들이 중노동을 하는 데도 그들은 더 가치와 보람을 느끼고 힘든 줄 모르고 재림운동을 한다. 체력, 영적으로 소모될만한데 점점 뜨거워간다.

우리는 2~3주일마다 모여서 예수님을 읽고 기도한다.

'시대의 소망'을 밤새워서 함께 읽고 기도한다.

예수가 무한한 힘의 공급원이다. 우리스스로 그렇게 했으면 쓰러졌을 것이다.

용광로 앞이든 어디든 예수를 타면 가장 편하다.

<본론>예수를 제대로 본 사람들

이사야서 12장 5절에 예수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예수의 태도, 모습, 행동속에서 세상사람들은 멸시와 조롱할 만한 모습이라고 여겼다.

그당시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아무런 추구할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식인들이 더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아무 가치나 의미를 보지못했다.

그러나 일부는 예수야말로 위대함, 참, 선이라고 생각하고 몰입되어 갔다.

막달라 마리아, 삭개오, 열두 제자들이 그랬다.

생명이 빛을 드러냈을때 우리는 생명을 보는 눈이 있어야한다. 우리는 흔히 세상속에서는 성공을 한다. 성공을 한 사람들이 시스템밖에서 아름다움, 진리가 왔을 때 더 잘 알아본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그것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알아봤다.

막달라 마리아, 삭개오 제자들, 이방인들이 그랬다.

결국 예수의 태도가 나에게 절대선이나 가치로 보이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편 22편 6절-20절에는 '예수의 고난'이 나타나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하시는 가? 십자가상에서 예수는 조롱하고 있는 세상사람들을 향해서 쩔쩔매고 있다. 전능함을 가지고도 이렇게 하는 것은 오묘한 아름다움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 쩔쩔매는 모습이 신기한 아름다움이다.

능력의 하나님을 보다가, 전능을 가지고도 쩔쩔매는 하나님을 보고있다.

이것이야 말로 천사들이 눈을 뗄 수 없는 신기한 아름다움이다.

예수의 참됨, 선함, 아름다움이 보이면 "내 문제가 아무런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아기예수는 우주의 창조자이다.

하늘에 가면 요한계시록 5장의 대관식에서 아기예수의 모습과 영광스러운 모습이 우리를 찬양하게 한다. 베들레헴 아기, 나사렛 작업복 소년의 예수의 모습을 기억하고 가지고 간다.

온도차이로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하듯이 예수님의 이러한(멸시·조롱과 영광)차이로 온 우주가 생기로 가득 찬다. 정서적인 안정은 세상이 주는 것에 비할 바가 못된다.

거기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게 된다.

보이는 모든 것이 노래를 하고 있다.

심지어 앉아있는 의자도 노래를 하고 있으며 나도 노래가 되었으면 한다.

하나님은 진선미가 필요하게 인간을 만들었다.

동서남북 어디를 돌아봐도 온 세상이 돈, 명예, 권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예수를 제대로 보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사람은 능력이 있다고 하면 추종하고 싶어한다.

능력이 있고 참되면, 존경할 만 하다고 한다.

게다가 선하다면 더 높일 것이다. 또한 아름답기까지 하면 넋이 나갈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그 모습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법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집몇채보다 비싼 가격의 유향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면서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의 생애는 프로그램대로 된 것도 아니다.

마귀의 책동이 있었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예수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나고 33년 동안 마귀는 예수의 일을 막는 것이 오히려 예수를 돗보이게 했다.

지금 우리는 범죄의 가능성이 많은 곳에서 없는 곳으로 가는 거대한 구조조정 작업중에 살고있다. 구조조정중에서 예수가 격하되고 우리가 격상됐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분에게 몰입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라는 대상을 보면서 자기를 잊어버리는 과정"을 구원이라고 한다. 즉 자기 자신을 예수안에서 잊어버리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를 자유케한다. 불교는 자기 스스로 이뤄내려고 한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불교처럼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관찰해볼 일이다.

자기 관점으로 보니까 사물이 잘 안보인다. 우리는 배우자, 자식도 다 자기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자식에게도 변호사, 박사, 의사가 될 것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창녀이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봤을 때 달라졌다. 막달라 마리아는 캄캄한 인생의 구덩이에서 예수를 보았다. 자신도 예수처럼 맑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사기꾼도 마찬가지이다. 의지력도 없고 게으른 사람이 예수보면 달라진다.

<결론>예수의 참됨, 선함,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예수라는 환경의 지배를 받게되면 예수를 닮아 온유해지고 겸손해진다. 예수라는 환경, 예수라는 차를 타기 바란다.

누가복음 2장 29절

그분안에서 참됨, 선함, 아름다움을 발견하길 바란다. 구원, 영원, 절대를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 이젠 죽어도 좋습니다하는 심정이 되길 바란다. 예수는 아기로서도 벌써 구원이다.

십자가가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는 무조건 구원이다.

베들레헴의 그 모습만으로도 감동이 된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남이 나에게 사기치거나, 혹은 세상의 성공으로 내가 자만심에 빠지게 되는 등 숱한 곡절을 살면서 겪게된다. 이처럼 우리가 겪는 인간의 모든 모습속에서 예수의 행동을 통해서 즉 그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우리는 배우면서 그를 찾아갈 것이다. 예수라는 차를 타고 가면서 하늘나라에서 더 큰 감사를 하기 바란다.

*조언

'시대의 소망'을 읽기 바란다. 암기할 정도로 읽기 바란다. 목차는 외운다. 그리고 장면 장면을 연상하기 바란다. 그러다보면 예수님을 닮아가게된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영성이 된다. 교회의 부흥은 우리 성도 개개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교인들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강기별, 안식일 기별등 모든 복음은 예수를 통해서 완성된다.

 

기도제목

1.하용판 장로 대륙선교회와 중국선교사

2.나와 가족, 자녀들의 영혼

3.이 시대에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할 일을 위해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