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고린도전서 12:28-31

제목:새벽기도회를 통해 받은 은혜

 

<서론>

지난 2009년 두 번째 일요일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게됐다.

그전까지는 교회에서 주최하는 새벽기도회가 매월 첫째주 일요일에 있던 것을 그 당시 안식일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인치현 집사님과 부교장 오동철 집사님, 이준우 집사님 그리고 제가 중심이 되어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위해서 새벽기도회를 매주 주최하자는 데 합의하고 자율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동철 집사님의 주재로 기도와 찬미중심으로 순서를 이끌어갔다. 당시에는 본당에서 새벽 5시30분에 시작했으며 다함께 단앞에 나와서 무릎꿇고 서로를 위해서 손잡고 통성으로 기도했다. 또한 아픈 교인들을 위해서 안수기도하는 순서도 가졌다.

그러나 우리교회의 문화가 통성기도하는 것과 안수기도하는 것에 대해 낮설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조용히 각자 기도하는 형식으로 바꾸었다.

2009년 6월부터는 오동철 집사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제가 새벽기도회를 이끌어가게됐다.

초창기에는 제가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한달간 진행하기도 하다가 그후부터는 매주 말씀을 전하실 분을 섭외해서 짧게 15분정도 간증 혹은 말씀을 전하게됐다. 현재는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제가 교회 웹사이트에 매주 게재하고 있다. 지난해 2월 노춘관 장로님이 설교하신 안식일에 무려 50분이 참석을 약속해주셨다. 이분들 가운데 일요일 새벽기도회에 참석은 못하시더라도 같이 기도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참석을 약속하신 성도 명단은 다음과 같다. **무순,존칭생략

황순화, 김현주, 정근우, 남상선, 박계수, 김호성, 장귀남, 김근헌, 장명자, 박흥률, 윤재현, 진정식, 김성희, 김무련, 남차순, 오태선, 김서경, 박성희, 전광진, 이선화, 김학은, 정미금, 강영호, 정옥복, 지성철, 지성현, 권정순, 송연호, 최경주, 함경화, 오성훈, 이영자, 이혜영, 조원혁, 강대현, 장창수, 엄순임, 장양자, 유영진, 김은희, 나경순, 김정은, 안종설, 이하성, 이형숙, 노춘관, 김희조, 도은덕, 이지혜, 오동철, 조영희(이하 50명)

 

<본론>

새벽기도회를 통해 내가 받은 은혜

첫째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됐다.

우리가 기도했던 이선화 집사님의 딸 카롤리나 선우가 회복된 것을 비롯해 그동안 교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우리 교우들이 다시 참석하게 됐고 병을 가진 분들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사실 저는 기도하는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요 새벽기도회를 진행하다보니까 교우들의 사정과 어려움을 알게되고 또한 우리의 문제를 알게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둘셋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함께 계셔서 저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또한 응답해주신다고 하셨다. 응답을 받으면 받은대로 또 안받으면 안받은대로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가 된다.

둘째 처음에 엄청난 부담으로 생각했던 기도회가 오히려 저에게는 축복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죄를 많이 행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기도회를 통해서 일주일간 지은 나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게 되는 시간을 갖게되면서 다시 주님말씀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됐다. 또한 교회의 부흥과 발전, 또한 우리가 속한 커뮤니티의 개혁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땅의 개선과 축복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과연 우리의 신앙 생활의 좌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깨닫게됐다. 여러분도 여러분께 맡기어진 순서와 책임을 감당하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감당하실 만한 능력을 주시며 본인의 신앙이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그것은 거룩한 부담이다. 교회는 목사님만 사역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평신도 전체의 사역의 장이라고 본다.

4월 한달간 안식일 학교순서는 기억절 암송을 통해서 받은 은혜, 성경통독을 통해서 받은 은혜등에 우리가 토론하고 또한 간증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제가 말씀드리기전에 여러분께서 자원해서 말씀해주시면 더욱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셋째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예배와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되었다.

사실 저 혼자 새벽기도회를 진행하라고 하면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 새벽기도회를 시작할때는 인치현, 오동철, 이준우 집사님등 든든한 믿음의 동지들이 있었고 제가 힘들어할때는 우리 화요성경공부반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강영호 장로님, 김학은 장로님 그리고 정옥복, 정미금 집사님을 비롯해 화요성경공부반에서 공부하시는 10여명이 넘는 교우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장창수 장로님과 엄순임 집사님도 단 한번도 새벽기도회를 거르지않고 참석하면서 많은 격려를 해주신다. 오성훈 목사님, 황순화 목사님, 이창희 목사님의 말씀과 기도도 큰 힘이 되었다. 게다가 새벽성서학교도 선교회의 권유로 참석하게 되어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 제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신앙공동체의 힘으로 해나가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교회에 소속되어있다는 것, 또 각 모임과 예배에 소속되어있다는 것은 저희에게 엄청난 축복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교회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는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약물중독으로 고통받는 이가 거의 없다.

▲그들은 성적으로 더욱 책임감있게 행동한다.

▲그들은 사업윤리나 경영윤리를 더욱 잘 지킨다.

▲그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풍부한 인맥과 동료들이 있다.

▲그들은 높은 자존감과 성취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재난, 건강 문제등을 잘 감당한다.

▲그들은 사랑, 용서, 만족등 긍정적인 감정을 품고 사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죄책감, 두려움, 적대감, 분노등 부정적인 감정을 덜 품고 사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 소속된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다. 그와 같은 환경은 몸과 영혼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물론 공동체안에 문제가 발생하면, 분노하고 슬퍼하며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 교회에 남아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자들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도움과 우정, 격려를 교회안에서 발견하게된다.

 

<결론>

미약하고 죄많고 흠이 많고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제가 새벽기도회를 진행하면서 생활습관이 변하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습관이 형성되고 구원의 확신이 왜 중요하며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무엇이 우선과제인지 깨닫게되었다. 사실 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아니다. 평일에 야근을 한다든가 아니면 늦게 잘 경우 오전 9시 출근에 간신히 맞추어서 갈 정도이다. 아직도 그렇다. 그렇지만 일요새벽기도회때는 저절로 눈이 떠진다. 물론 새벽에 몸이 조금 무겁다거나 아플 때도 있어서 가기 싫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갖다 오고나면 얼마나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지 모른다. 게다가 매달 첫 번째 안식일은 저희들이 새벽기도회후 산행을 하면서 교우간에 교제하는 시간도 갖게된다.

새벽기도회는 제가 진행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 교인 모두의 것이며 또한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희는 단지 주님안에서 종노릇하는 것이다.

올해 안식일 학교 교장선생님이신 강인정 장로님이 설정하신 성경주제절을 기억하십니까?

데전 5장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렇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이다.

기도하다보면 방법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합당한 방향으로 인도하여 주신다. 현재 새벽기도회는 담임목사님과 영어권목사님, 일곱분의 장로님, 수석 남녀집사님이 한달씩 맡아서 말씀하실 분을 섭외하는등 순서를 진행하고 있다. 내년에는 새벽기도회가 어떤 포맷으로 진행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공동주제를 놓고 기도해야하며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새벽기도회에 참석을 못하시라도 그 시간에 같이 기도해주시면 된다.

분명히 새벽기도회가 저희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기도할 수 있는데 괜히, 걱정과 염려만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부흥찬양집 15장, ‘기도할 수 있는데’를 다 함께 부르며 제 순서를 마치겠다.

<기도할 수 있는 데>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반복

주님앞에 무릅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