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01 19:41
절망에서 희망으로…
김세만 (Jay Kim)
지난 해 뇌종양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암의 고통과 아픔이 뼈저리게 느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땡볕에 말라 죽어가는 불가사리 하나를 구하려는 마음처럼 육신적, 정신적 고통과
충격 속에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간절한 열망이 생깁니다. 이 글을 통해 암의 충격으로부터 수술, 방사선 요법, 키모 요법
외에 자연적 대체 요법을 통해 모든 암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기를 원합니다.
나는 충청도에서
주님을 모르는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국민학교 때 피아노를 배워 여러 모임에 나가 반주를 했었습니다.
청년 시절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을 때입니다. 하얀
돌소금을 먹어가며 불볕더위 아래서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일날이 되어 교회에 갈 사람을 부를 때 처음으로 군인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양 가사와 음률이 내 마음 속에 밀려 들었습니다. 그동안 방황하던 삶에 대해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으로
나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이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판문점 가까운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에도 주일날 교회갈 사람을 부름에 따라 나섰습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군인교회에서 찬송가
반주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왔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주일 오전, 저녁, 수요 예배 등,
1주에
3번
피아노 반주를 할 기회를 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좀 더 가깝게 대하며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미국오기 전 2년 반동안 경희대학병원으로 인도하시고 직장 내의 찬양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도소, 고아원, 작은 교회 등을 순방하며 4영리와 찬양, 율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새롭게 하소서’ 모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1982년에 씨애틀에 오게 되었고 Seattle University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하다가 1984년 남가주로 내려왔습니다. 당시에
버몬트와 올림픽 코너에
있던 도넛샵에서 머핀 한 개 살 돈조차 없어 답답했던 날들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 후 내가 발명한 자동차 연료절약 장치인 “토네이도(Tornado)”의 성능이 인정을 받으면서 미국의 자동차 전문잡지, 신문, 라디오, TV등에 알려지고 미 주류 자동차 부품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KBS를
통해 전국으로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나의 미국 삶이 TV에서 방송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읍니다. 그
방송의 비데오 클립은 지금도 www.youtube.com에 ‘KTSD
KBS Tornado Docu’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 부품사업은 이곳 남가주에 Red Line 통근열차 건설 계획과 함께 예견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어려움 또한 감당키 힘든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가정/결혼/행복/아픔에
대하여 바이올라(Biola)
대학교의 마이클 곤잘레스(Michael
Gonzales) 교수와 생각을 나누며 쓴 책 ‘Love Can Lasts In A Fast Food Society’가 나오게 되었고 뉴욕의 북 엑스포에서 서적 사인회도 열었습니다. 일본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의 통역으로 Book Sharing 을
하기도 했습니다.
‘Supersize Me’라는 맥도널드 음식과 건강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가정, 결혼, 이혼을 주제로 각 인종과 종교의 결혼, 이혼에 대한 문제를 다룬 영화 ‘Divorced American’을 바이올라 대학교와
함께 제작하여 유니버셜 스튜디오(Universal Studio)에서 개봉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지역사회의
청년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2010년에는 놀랍게도 미연방정부가 본인을 ‘2010년 모범 중소기업인(Entrepreneur
of the Year) 12명중의 한 명으로 선정했습니다. 또한
그 날 오후에는 막내 딸 혜진이가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Senior
President로 선정되어 자랑스러운 연설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쁜 일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나 원치 않았던 2011년 4월 또한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4월
23일 9시, Oakland 북가주
합창단 모임 준비를 위해 떠나며 이상하게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10시 30분 공항에서 보딩패스를 왼손에 들었는데 갑자기 그 가벼운 종이조각을 들 수가 없어 떨어뜨렸습니다. 4월24일에는 오전에 교회를 가려다가 성경책을 왼손에서 떨어뜨렸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의사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상황을
설명하자 당장에 응급실로 가라고 했습니다.
불과 몇 달 전 정기검진 받았던 UCLA
병원에서 충격적인 진단결과를 들었습니다. 머리 속에 암이 생겨서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뇌암진단을
받으며 5년
전, 그토록 건강하셔서 80세 중반에도 골프를 하시던 아버님이 폐암 발병 1년 만에
눈을 감으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버님은 맨주먹으로 일어나서 조그만 인쇄소를 70년대 한국에서 두 번째 규모의 초대형 인쇄회사로 키우셨던 분입니다.
주말의 응급실은 복잡했습니다. 총을 맞고 들어온 범인과 그를 지키는 경찰들, 고통의 신음 속에 무언가 도움을 구하는 환자들
… MRI를
찍은 후 새벽 3시경
의사로부터 “너무도 다행이다. 제시간에 딱 맞추어 입원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오른쪽 머리 안 골프공만한 종양(3.5x3cm)으로 인하여 사망하든지 왼쪽의 마비가 올 수 있었다.”라며 급히 수술일정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수술 전 혈액, 혈압, 각종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지난 삶들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나의 삶 속에서 소중하고 고마왔던 분들, 어머님, 가족, 친구들에게 상황을 알려드렸습니다. 기도해 주기 위해 방문하셨던 전길성 목사님, 남가주 소년소녀합창단의 노형건 단장, 마이클
곤잘레스 교수, 박상익, 박창진 등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4월 28일, 수술일정을 앞당겨 수술실로 향했습니다. 마취가 시작되면서 어쩌면 다시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를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가며 다시 한 번 지난 50여년의 삶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 형들, 여동생, 가까운 동무, 친척들과의 추억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받던 일, 군인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담당하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역경 가운데 잘 넘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던 일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직 수술실의 커다란 불이 켜있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이 너무도 성공적이었으며
나의 심장 박동이 자신의 것보다 더 좋다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회복실에 들어가니 수술모자에 27여 바늘을 꿰맨 환자가 거의 정신이 든 상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간호원이
놀란 듯 눈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수술 후 바늘이 머리를 찌르듯 심한 고통에
깊은 밤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습니다. 여러가지 진통제들을 복용하며 주님의 손에 못자국, 허리에 창자국의 고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가운데 나의 아픔을 순간 순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7월 21일의 척추
수액 조직검사에서 두뇌로부터 대부분 주요 장기에 연결된 척추액에 암성분이 발견되었습니다. 7월 29일,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저녁식사를 나누던 중 왼손의 접시가 옆으로 기울며 음식을 떨어뜨렸습니다. 8월
6일에는 웨스틴 호텔에서 회의 후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갑자기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이
들어서 보니 몇 번인가 굴러서 바닥에 누워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응급실에서 MRI를 촬영하니 의사들이 매우 위급한 듯 종양이 급성으로 3개로 다시 늘었고 치료방법은 오직 스테로이드와 키모치료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호스피스 간호사들은 나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상황이 너무 위급하니 곧 장례식 준비를 해야 한다고 통보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속수무책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녕
희망은 없는 것이었을까요?
응급실, 수술실, 집을 오가며 일반적인 암 치료법인 암덩어리를
잘라내는 수술, 방사선
요법,
키모에 따른 부작용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암이 발생 할 수 있는 내
몸의 환경은 그대로 두고 암 덩어리만 어떻게 해 보려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료를 하더라도 암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재발의 가능성도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9월 말로 들어서면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머리의
통증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11월 세 번째 주에 MRI 를 찍고 돌아온 후 오후 늦게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Congratulations!”
의사가 종양의 대부분이 줄어들었다는 결과를 알려 주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11월 추수감사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물론 암발병 후 적어도 5년을 넘겨야 안심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Ron Bell
교수가 찾아왔습니다. 암에 관한 독일계 의사의 부작용이 없는 대체 요법인 자연식 치유법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암이란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의 결핍으로
인한 면역의 약화임을 알게 되어 퇴원 후에는 식생활을 바꾸었습니다. 그동안 수십 년 내 몸 안에 쌓였던 중금속 독소 제거하는 ‘Detox’를 위해 각종
신선한 유기농 과일과 야채류를
많이 섭취하며, 음료수는 알칼리성 식수로 바꾸었습니다.
새삼스럽게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마음 자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에 걱정하기로 하고 그저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의 충격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작은 소망과 희망의
등대가 되고저 이 글을 적어 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치하에서 극소수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코리 텐 붐여사가 떠오릅니다. 모든 사람이 독가스로 죽어가는 속에서도 그 분을
생존케 했던 것은 바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KBS에서 방송된 김세만 집사의 미국 자동차 부품시장 진출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뇌수술
직후의 김세만 집사 수술후
병실에서